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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수 교수의 교회사 클래스_ 거룩한 신념이냐, 형제 사랑이냐
    Book_책 2022. 8. 4. 06:28

    키프리아누스 vs 노바티우스

    데키우스 왕의 후폭풍 (1장 참고, 로마의 멸망의 원인이 옛 신들이라 믿고, 옛 신들을 다시 숭배하고, 숭배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증명서. 그 증명서 때문에 신앙을 저버린자 아니면 순교 당한 자)이 지나고 신앙을 버린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 들어야 하는가? 키프라이누스와 같은 사람들은 비록 변절을 하였더라도 회개하면 그 사람들을 받아주자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의 배경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 노바티아누스는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엄격했다. 그는 용서하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순수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배교자들을 교회에서 속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되는 두 주장으로 교회에 혼란이 닥쳤다. 교향 코르넬리우스가 키프라이누스를 지지하였고, 노바티아누스 지지자들은 따라서 그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했다.  

     

    고백자들 vs 배반자들

    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재위 말기에 정치 불안이 가증되자 전통적인 로마 종교의 부흥에 힘쓰면서 황제숭배 이데올리기를 강화했다. 따라 303년 로마제국 전체에 그리스도교에대한 박해를 단행했다. 성서를 로마 군인들에게 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당시는 성서가 귀한 자료였기에 대부분이 성직자들이었다. 데키우스 박해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변절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내분이 다시 대두되었다.

    배교자들에게 엄격한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들과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하는 온건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박해를 이겼던 고백자들 성서를 넘겨주었던 배반자들이 생겨났다. 고백자들은 배반자들의 권위를 다시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카이킬리아누스는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지만 고백자들은 그를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안수했던 자들 중에는 배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가 행했던 안수는 효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 마요리누스라는 자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출했고, 그가 죽은 후 도나투스를 감독으로 세웠다.

     

    인효론 vs 사효론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성사의 유요성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자격과 가치에 달려 있기 때문에 배반자들이 행한 성례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키아킬리아누스 지지자들은 성사를 행하는 사람의 자격과 가치가 아니라 성서 자체에서 성사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성사를 행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효력이 좌우된다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이론을 인효론이라고 하고, 성사 그 자체에서 효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사효론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효론을 지지했다.)

    도나투스파의 사람들은 키아킬리아누스 진영의 목회자에게 세례를 받고 온 신자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 재세례를 행한 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아주 큰 문제가 되는 행위였지만, 노타누스주의자들은 배반자들에게 받은 세례는 참된 세례가 아니기 떄문에 무효이며, 따라서 자신들이 베푸는 세례는 재세례가 아니라 처음 세례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소위 재세레파 논쟁에서 다시 불거진다.

     

    도나투스파 vs 가톨릭파

      아프리카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도나투스주의자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세력을 확장시켰다. 교회에 대한 순수성과 아울러 지역적이고 사회적인 배경 때문이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 지역을 기반으로 두었다. 그 지역은 농경지대로 아프리카의 토착전통을 유지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카이킬리아누스 지지자들은 카르타고 주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지역은 로마화된 도시로 상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상류계층들이 모여 있는 로마 총독령이었다. 도나투스파 교회는 신학적 차이와 아울러, 사회 경제적 차이로 인해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서 로마카톨릭교회보다 더 큰 세력을 확보한다.

    340년 대 후반에 이으러 일부 도나투스주의자들이 당시 종말론적 사상을 품고 사회변혁을 추구한 키르쿰켈리온파에 합세함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키르쿰켈리온파는 그리스도를 위한 순수한 전사로 자처하며 전장에서 죽는 것이야 말로 명예로운 순교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국가에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이 결과 그들은 공권력 박해를 받아 처형되거나 추방되는 비운을 겪었다.

      도나투스 사후에도 추종자들은 계속 카톨릭과 논쟁을 벌이다가 411년 카르타고에서 도나투스파와 카톨릭측이 모여 사흘에 걸쳐 논쟁을 벌였으나 도나투스파에게 불리한 결론이 내어졌다. 결국 415년 로마 황제는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한다고 공표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도나투스파 논쟁은 교회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직면하게 되는 실존적 갈등을 다룬 논쟁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 혹은 어떤 입장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수있다.

    도나투스파 논쟁은 16세기에 와서 재세례파 논쟁으로 재연된다. 재세례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세례란 스스로의 결단으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성례이고, 교회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며, 교회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분립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 츠빙글리, 칼뱅과 같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세례란 인간의 결단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유아세례라 할지라도 참된 세례이며, 따라서 재세례를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하나의 그리고 거룩한 교회를 지향하며

    니케아신경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교회를 고백한다.교회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동시에 거룩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두 원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다. 노바티아누스 논쟁, 도나투스 논쟁, 재세례파 논쟁, 신사참배 논쟁은 모두 그러한 경우다.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하고자 무조건 용서와 사랑만을 강조하여 성도들의 삶을 나태하고 해이하게 만드는 것도 능사가 아니며,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고자 지나친 엄격주의를 지향해 분파와 분열을 초래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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