υπηετηs - μαρτυς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 성경 사도행전 26장 16절 말씀
우리말 종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명사 '휘페레테스'(υπηετηs)는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배 밑창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없기에 휘페레테스는 자신이 노를 젓는 배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배와 관련해서 그 어떤 결정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고수가 치는 북의 소리 속도에 맞추어, 자신의 힘과 의지를 다해 노를 저을 뿐입니다.
자신이 노를 젓는 배가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나아갈 것인가,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함장의 소관입니다.
성경 속 바울은 그와같은 주님의 휘페레테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 속 바울은
그와같은 주님의 휘페레테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말 증인이라 번역된 헬라어 명사 '마르튀스(μαρτυς)'에서 순교자를 뜻하는 라틴어 마르티러가 유래했습니다.
참된 증인은 자신의 증언에 대해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위해 생명을 걸기는 커녕 왜곡하거나 거짓되게 전하는 사람은 위증인일뿐,
어떤 경우에도 참된 증인일 수 없습니다. 참된 증인은 언제나 생명을 걸고 진실을 증언하기에 증인과 순교자는 동의어와 같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이미 본 것과 앞으로 보게 될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주님의 마르튀스로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설교 시간에 종과 증인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헬라어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대체해 왔습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본래의 뜻을 상실해 버린 우리말 종과 증인은 성경의 용어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의 바른 뜻을 반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주님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을 할 때 우리의 정체성이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라는 의미로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머니나 명예와는 상관없이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휘페레테스로 지금 살고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주님의 종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요구사항을 주님께 매일 명령하기만 하는 주님의 주인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교회 목사 가운데 자기에게 스스로 '님'자를 붙여서 자기를 목사님이라고 표현하는 목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잖은 교인들이 자기 교회 목사를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종은 본래 '님'자가 붙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교인이 자기 교회 목사를 '종님'이라고 부를 때, 그 교인에게 목사는 이미 주님의 종이 아닙니다. 또한 한국교회 거의 대부분의 목사는, 노소를 막론하고 공식석상에서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부릅니다. 사모는 다른 사람이 목사의 아내를 높여 불러 주는 호칭인데도, 승려가 자신을 스님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주님의 종이여야 할 목사 스스로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높여서 부릅니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종이란 단어는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휘페레테스의 의미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또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증언할 곳은 법원 청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온통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언해야 할 법정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의 법정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의 생명을 걸고 있습니까? 불이익을 감수하고 세상의 명예를 잃으면서까지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법조인에게 확인해보니 2015년 한 해 동안에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의 수가, 약식 사건 959명, 일반 공판 사건 1250명, 총 2209명이나 되었습니다. 단 한 해 동안 사법부에 의해 밝혀진 위증만 이 정도이니, 우리 사회에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거짓이 횡횡하고 있겠습니까? * 위증죄 (僞證罪) 법률에 의하여 선서한 증인이 허위의 진술을 하는 죄
이처럼 거짓은 오래 전부터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럼 없이 주님의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말 증인이란 단어 역시 성경의 마르튀스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실정입니다.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말은 사람의 대화에서 결국 퇴출 당하고 맙니다. 그 말로는 더이상 바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사람들은 애국애족이란 말을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말이 정치인들에 의해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정치인들이 애국애족을 빙자해서 자기 야욕을 추구한 것입니다. 애국애족(愛國愛族) 자기(自己)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함 그 결과 우리 삶 속에서 그 아름다운 애국애족이라는 말이 퇴출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사용하면 자칫 정치 모리배로 오해받기 십상인 까닭입니다. 정치 모리배 도의를 무시하고 부정한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이나 사기꾼을 뜻하는 말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종과 증인이라는 단어 역시 앞에서 확인해 본 것처럼 세속화되고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그 오염된 단어로는 성경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를 바르게 표현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종과 증인이라는 말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계속해서 헬라어 원전에 기록되어 있는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를 사용할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황제에게 상소하도록 신비롭게 역사하신 것은, 바울을 황제의 법정에 황제의 법정이 있는 로마 제국의 심장 로마에, 당신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내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적당하게 살면서 자기 주머니나 명성을 위해 거짓 증언마저 서슴치 않는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과연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일평생 주님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다해 주님의 말씀을 쫓았고, 그 말씀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살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죽임 당하셨다가 삼일만에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살아나신 메시아이심을 확실히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황제의 법정에 당신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세우시기 위해 그토록 신비롭게 역사하신 것은 당연한 귀결(歸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인 바울이 황제의 법정이 있는 로마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의 여정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유라굴라 광풍이 아무리 죽음의 광풍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그 광풍 속에서 바울을 온전히 건져 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럿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졌다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친히 바울을 지켜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중해 한 가운데에서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황제의 법정에 서야 할 당신의 휘페레테스이자 마르튀스임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이 그 사실을 잊지 않는 한, 바울에게는 근심할 것도 두려워 할 것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살아가는 것이 바울의 의무라면, 당신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은, 바울의 주인이신 주님의 책임이었습니다.
최근에 부산에 살고 있는 남성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올해 51세인 그 분은 경제적으로 실패했고 아내와도 이혼해서 가정적으로도 실패한 실패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쓴 '새신자반'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제게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을 방 안에서 성경만 읽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그런 삶은 내일을 위해 뿌리는 씨가 있을 수 없음으로, 내일이면 삶이 더 악화 될 것입니다. 당신이 51년 동안 살고 지금 실패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지난 51년 동안 당신이 잘못 살아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였으니, 설령 리어커를 끌거나 공사판 노무자로 일하더라도 지금부터 매일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오늘의 결과인 새로운 미래가 보장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인생 사용 설명서입니다. 인생 사용 설명서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어긋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어긋난 인생이라도 인생 사용 설명서를 따르는 순간부터 반드시 오늘의 결과로 새로운 미래가 축적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산다는 것이 그 말씀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함에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삶으로 생명을 걸고 말씀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살아가는 사람을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책임져 주심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무엇의 휘페레테스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언행은 우리 자신이 누구의 마르튀스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습니까? 자기 욕망과 자기 욕정과 자기 이기심의 휘페레테스인 것은 아닙니까? 오직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자기 자신의 마르튀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언젠가 한순간에 우리를 덮칠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에 속수무책으로 삼킴 당하고 말 것입니다. 솔로몬의 증언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인생은 죽음의 밥일뿐, 죽음을 이길 능력도 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의 휘페레테스, 말씀의 마르튀스로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말씀의 휘페레테스와 말씀의 마르튀스로 살아가는 한,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반드시 새로운 미래가 보장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건 그 말씀이 곧, 죽음을 깨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출처: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께서 2017년 8월 13일 주일날 '가이사 앞에 서야'란 주제로 말씀하신 내용 중에 일부를 올려보았습니다.